수레바퀴 아래서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저/김이섭
헤세 자신의 자전적 소설. 민감한 정신의 소유자이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어린 신학도 한스 기벤라트는 헤세의 분신이다. 그가 엄격한 신학교의 규율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학교에서 쫓겨난 점, 작은 고향 도시로 돌아와 공장의 견습공으로 새로운 삶을 열어보려 했던 시도 등은 헤세의 우울한 청소년기와 겹치는 장면들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헤세가 세계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아를 발견하여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예술로 승화시킨 반면 한스는 엄격하고 딱딱한 집안 분위기, 그에 버금가는 학교 교육 및 사회의 전통과 권위에 눌려 파멸하고 만다는 점이다. 그랬을 때 "수레바퀴 아래서"란 비유적 표현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세계의 톱니에 짓눌린 여린 영혼을 떠올릴 수 있다.
1.

1906년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이후 1919년의 데미안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하일너와 데미안, 그리고 한스와 싱클레어는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하일너는 데미안과 달리 한스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한스의 자아를 찾게 해준 인물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오히려 데미안과 닮은 인물을 찾자면.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결코 한스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는다. 물론 반대적인 입장에서의 간섭이었겠지만,
무신론자인 목사에게 과외를 받고, 방학에 공부를 하는 한스에게 그래선 안됨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간섭 하지 않는다. 

그는 구원자가 될 수 있음에도... 한스를 수레바퀴의 굴레에서 그를 끌어낼 순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2.

헤세의 작품중에선 가장 읽기 편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글이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공부라는 수레바퀴에 얽매여 있음이다.
하지만 그 수레바퀴에서 쳇바퀴 돌듯 달리는 한스는, 바깥을 보지 못한다.

수레바퀴의 바깥을 경험하게 해준 하일너가 있지만 그뿐이었다. 
바깥을 보았지만 그는 적응하지 못하였고 어전히 그 굴레속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신학교를 그만둔 이후에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랑도, 직업도.

하지만 그 수레바퀴의 굴레에서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한스는 생을 마감한다.

3. 

왜 헤세는 한스가 죽는 것으로 소설을 끝마쳤을까...?
플라이크와 아버지의 대화로 자각하게 하려함이었을까,?
아니면 피해자 한스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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